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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BC 디지털크리에이티브센터 최별 PD

    “오느른, 어른은,
    지금 이곳에서 사는 중입니다”

    • 이경희
    • 사진 김범기
  • 집은 우리 삶에 어떤 존재일까? 서울에 마련한, 이왕이면 한강 이남에 위치한 아파트가 성공한 삶의 척도가 되는 시대, MBC 직원으로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는 최별 PD는 화려한 도시 싱글라이프를 마다하고 전라북도 김제시 시골 마을로 내려갔다. 115년이나 된 4,500만 원짜리 폐가를 사서 그보다 더 많은 돈을 들여 고친 뒤 자신의 일상을 담은 유튜브 채널 ‘오느른’을 운영하고 있는 그녀를 만났다.
유년 시절의 집

기억의 숲을 헤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4살 무렵 “시골에서 한 번쯤은 살아봐야 한다.”는 엄마, 아빠의 주장에 남양주로 들어갔던 기억. 오래된 가족사진으로 남아 있는 그곳은 안마당과 툇마루, 처마가 있는 전형적인 시골집이었고 최별 PD는 그 집은 행복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4살이면 사실 기억이 잘 안 날 텐데 한 장면이 유독 뇌리에 남아있어요. 엄마, 아빠가 고추밭에서 일하고 있는데 제가 근처에서 혼자 땅을 파고 풀을 헤집으며 놀았던 기억이요. 그게 굉장히 기분 좋게 남아있고 돌이켜보면 그때가 우리 집의 전성기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찾을 때도 어쩌면 그때 모양의, 그런 느낌의 집을 찾았던 것 같아요.”

최별 PD가 빛이 잘 들어오는 거실 복판에 걸어둔 사진을 바라본다. 빛바랬지만 아직 그 시절의 색깔이 엷게 남아있는 사진. 그 안에는 툇마루에 걸터앉은 부모님과 그 무릎에 앉은 어린 두 딸이 옹기종기 모여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최별 PD는 MBC 디지털크리에이티브센터 M드로메다스튜디오팀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프로듀서이다. 세속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화려하고 근사한, 성공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는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파를 통해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기회를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인생이 확 변한 시기가 있었어요. 돌이켜보면 그때부터 가족에 대한 이야기, 사회에 대한 이야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유튜브 ‘오느른’을 시작하고 7, 8회 정도 되니까 문득 내가 하고 싶었던 그 이야기들을 이렇게 하고 있나 봐,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게 이렇게 연결이 되는구나 싶었죠. 신기해요.”

도시민의 집

모든 이들이 그렇듯 어디서 사느냐는 꽤 중요한 문제였다. 최별 PD는 서울에서 참 많은 집에 살았었다. 300만 원에 30만 원짜리 반지하 원룸, 창문 없는 어두컴컴한 지하 고시원, 옥탑방까지…. 월급으로는 보증금 마련하기도 쉽지 않았던 직장인 시절을 그도 대출과 함께 고스란히 거쳐 왔다. 최 PD는 결국 서울이 아닌, 다른 곳을 꿈꾸기 시작했다. 바쁜 도시민의 삶에서 벗어나 쉬고 싶었고 잠만 자는 곳이 아닌, 집이라는 공간에서의 삶도 필요했다. 왜 김제였을까?

서울 근교로 집을 보러 다니던 그는 도로가 막히면 강화도에서 서울까지 3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안 뒤에 3시간이면 강화도나 김제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덜컥 김제의 폐가를 계약해 버린 것이다. 1억이 넘는 강화도 집들에 비해 4,500만 원밖에 안 하는 300평짜리 시골집이라니!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10년 차가 넘어가는 PD의 예리한 촉은 서울·수도권의 아파트에 대한 소유욕만큼이나 귀농과 힐링 공간, 세컨 하우스를 향한 현대인들의 간절한 열망이 이 시골집의 콘텐츠화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집수리가 힘들지 않았냐고요? 예전에 서울 개화동에 있는 아빠의 낡은 구옥을 수리했던 경험이 있어요. 그리고 저는 집을 짓는 게 PD가 하는 일과 굉장히 닮아있다고 생각해요. 조율하고 스케줄을 정리하고 순간순간 현장에서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걸 해결하고…. 이게 방송과 거의 비슷하거든요. 그런 부분은 이미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있었던 거죠.”

최별 PD가 환하게 웃었다. 거실을 뒤덮고 있는 오후의 햇살과 굉장히 닮아있는 미소다.

그리고 지금의 시골집

김제에서의 삶은 최별 PD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배달이 전혀 안 되는 탓에 처음에는 마트에 갈 때마다 스팸이나 통조림, 라면 등을 쓸어왔지만 지금은 최대한 가공식품을 줄이려고 노력한다. 동네 어르신들이 나눠주는 식자재들, 마당에서 가꾸는 제철 채소들로 밥상을 차리려고 애를 쓰다 보니 건강은 자연스레 따라왔다.
“집 앞에 도랑이 있어요. 이게 용수, 사람들이 사용한 물이 흐르는 물길이에요. 즉 제가 사용한 물이 제 눈에 보인다는 거죠. 여기서 살면서 택배도 굉장히 많이 시켰는데 그 택배 쓰레기들은 저쪽 안마당에 잔뜩 쌓여있어요. 사실 서울에서는 내가 쓰레기를 버리면 내 눈에 다시 안 띄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내가 버리는 쓰레기, 내가 쓴 물이 다 보이니까 ‘내가 혼자 사는데 이렇게까지 쓰레기가 나온다고?’ 놀라면서 ‘현타’가 왔어요.”
생각지도 못한 삶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옆집의 이 여사는 음식물 쓰레기를 앞쪽에 있는 논에 버려도 된다고 말해줬다. 겨울 논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래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음식물 쓰레기에 대한 정의는 서울과 김제가 달랐다. 서울에서의 음식물 쓰레기는 상한 것, 곰팡이 핀 것이었는데 이곳에서의 음식물 쓰레기는 요리를 하고 남은, 개나 고양이도 먹을 수 있는, 자투리 채소, 사과껍질 따위였던 것이다. PD가 숙명적으로 짊어지고 있는 윤리성에 묵직한 추가 더해지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걸 콘텐츠화하면 제가 이걸 다 지켜야 하는 거잖아요. 구독자들이 지켜보고 있으니까요(웃음). 어렵고 두렵고 고민이 엄청나게 클 수밖에 없었어요.”
최별 PD는 일단 비누와 샴푸를 모두 고체 형태로 된 것으로 바꾸는 것으로 첫 삽을 떴다고 귀띔을 해줬다.

더 촘촘해진 내 쉼의 밀도

MBC 최초의 유튜버로서 그의 삶은 매우 바쁘고 분주하다. 콘텐츠를 생산하는 행위와 동네 어르신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삶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쉬고 싶다,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으로 내려온 곳인데 너무 다른 삶이 아니냐고 묻자, 최별 PD가 또 웃는다.
“우리 동네 친구분들이 정말 쿨하세요. 제 프라이버시를 잘 지켜주시고 매너가 좋으시죠. 한창 유튜브에 업로드를 할 때는 사흘 촬영하고 사흘 내내 편집하고 하루 쉴까 말까 했는데 서울에서의 삶과 굉장히 다른 부분이 있어요. 바로 쉼의 밀도가 굉장히 높다는 거예요. 이곳은 정말 고요해요. 제 목소리와 효리, 리본이(키우는 강아지들) 소리가 전부에요. 거실에 앉아있으면 탁 트인 평야가 시야에 가득 펼쳐지죠. 10분을 멍 때리고 쉬어도 온전한 휴식감이 채워지는 거예요.”
이곳에서 더 행복해졌나? 라는 질문에 최 PD가 잠시 숙고한다. 그리고 행복에 대한 개념정리를 아직 못해서 그건 잘 모르겠지만 ‘평화롭다’라는 생각은 굉장히 많이 든다고 말했다.
“동네 자체가 큰 집이고 제 집은 방인 느낌이에요. 마을이 한 가족 같다는 말을 여기 와서 실감하고 있습니다. 서울 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득과 실을 무의식중에 따지고 있었던 제게 마을 어르신들은 ‘진짜 어른’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계세요.”
최별 PD와 함께 집 앞에서 한창 사진 촬영을 하는 와중에 옆집 어르신이 어느새 나와 지켜보고 서 있다. “다 마치고 나면 들어와서 커피나 한 잔 해.” 낯선 이들을 향해 툭, 조약돌처럼 던진 말이 몽글몽글 가슴에 맺힌다.
“네!”
100년도 더 된 집에서, 오늘을 살며, 미래를 궁금해하는, 최별 PD가 팔랑팔랑 앞장 서 옆집 현관문을 연다. 마치 여기가 바로 우리 동네예요! 라고 하듯 당당하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