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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의 여왕에 사로잡힌
    첫 캠핑카 여행

    캐나다 밴프

    • 그것은 하나의여행이었다(이종림 지음, 페이퍼스토리, 2019)
    • 사진 이종림, 황재락
  • 가끔 여행사진을 들춰볼 때면 내가 꿈을 꾼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믿기지 않는, 이제는 꿈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여행지.
    캐나다 밴프에서의 캠핑이 그랬다.
캠핑카의 로망

한번쯤 캠핑카를 타고 떠나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다. 미국에서 여행을 다니면 캠핑카나 캠핑 트레일러를 자주 본다. 집채만한 캠핑카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대개 여유로워 보이는 백인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차 안에 설치된 커다란 위성 TV로 스포츠 중계를 보고, 아침에는 개를 데리고 산책시키며 집보다 더 우아하게 생활한다. 우리도 캠핑카를 빌려서 다녀볼까? 사실 캠핑카를 빌리면 렌트비와 주유비도 비싸고 운전하기에도 까다롭다. 좁고 혼잡한 관광지에서는 캠핑카 출입을 막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기동성에 제한이 많다. 그래도 드넓은 미국에서 아니면 언제 캠핑카 여행을 해보랴. 남편은 오랫동안 크루즈 아메리카 사이트를 클릭하다가 첫 캠핑카 여행을 캐나다 밴프로 정했다.
캐나다 최초의 국립공원 밴프(Banff)와 그곳에서 4시간 정도 떨어진 재스퍼(Jasper)는 대표적인 관광지다. 로키마운틴의 동쪽 가장자리를 따라 호수와 산, 빙하, 야생동물 등 천혜의 대자연을 만날 수 있다. 밴프는 추운 날씨 때문에 6월 이후 8월까지가 성수기다. 우리는 그보다 조금 이른 5월에 5박 6일의 일정을 잡았다. 캠핑카를 조금이라도 저렴하게 빌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혹여나 춥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지만 5월 말은 노스캐롤라이나에서도 야외 수영장이 일제히 개장하며 여름을 알리는 시기다.
드디어 여행 출발일, 짐을 이끌고 공항에 도착해 검색대를 지나는데 예약해 놓은 비행편이 취소되었다는 메일이 왔다. 미국에서 캐나다는 동네 하나 건너가듯 매우 수월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험난한 시작이었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캐나다 캘거리에 도착했다. 집 떠난 지 17시간 만이다.
호텔에서 하룻밤 쉬고 다음날 캠핑카를 받으러 갔다. 우리가 빌린 캠핑카는 5인승이다. 집처럼 아늑한 캠핑카를 타고 딸 지호도 나도 아이처럼 좋아했다. 아무 데나 정차해 가스레인지로 음식을 해먹고, 캠핑장에 도착하면 물과 전기만 연결해서 바로 저녁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이 절약된다. 무엇보다 화장실이 있어 편하다. 좁지만 샤워도 가능하다. 지호는 캠핑장에 머물 때는 침대에서 뒹굴뒹굴하고 캠핑카가 달리는 동안에는 테이블에 앉아 그림을 그리거나 장난감을 갖고 놀았다.

  • 캐나다 밴프에서의 첫 캠핑카 여행
  • 눈 덮인 산맥과 하얗게 떠 있는 구름, 한 폭의 그림 속에 있던 우리
아름다운 호수를 따라 떠나는 여행

마트에서 신선한 고기와 채소들로 캠핑카의 넉넉한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 밴프 국립공원을 향해 출발했다. 캘거리에서 한 시간 정도 달려 밴프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은 아름다운 호수를 따라가는 여정이다. 국립공원 초입에 있는 미네완카호수에 도착하자 모든 게 쨍하니 선명하다. 햇빛이 너무 세서 조리개를 조이지 않으면 번번이 노출 과다로 찍힐 정도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쾌청한 하늘이 투명한 호수와 만났다. 눈 덮인 산맥과 하얗게 떠 있는 구름, 푸르게 빛나는 호수. 신선하고 맑은 공기에 모든 감각이 살아나는 듯했다. 사진을 찍어서 보니, 한 폭의 그림 속에 우리가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지구상에서 가장 잘 보존된 때 묻지 않은 자연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다음 호수로 이동하기 위해 캠핑카에 올라 탔다. 산양 한 마리가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동그랗게 말린 뿔이 독특한 산양들이 호숫가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다. 밴프의 그림 같은 비경은 이제 시작이었다.
다음날 모레인호수에 가려는데 그동안 쌓인 눈 때문에 길이 통제되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에메랄드호수로 넘어갔다. 에메랄드호수는 밴프와 붙어 있는 요호 국립공원에 속한 호수다. 다행히 에메랄드호수는 얼지 않고 잔잔하게 고여 있다.
파란색에 초록색 물감을 몇 방울 떨어뜨린 것 같은 빛깔이다. 기념품 가게에서 캐나다 단풍잎이 그려진 아기자기한 장식품을 구경하고 테라스로 나왔다. 그림 같은 호수 위로 카누들이 떠다닌다.
“우리도 한번 타볼까?”
남편의 제안으로 구명조끼를 입고 카누에 올라탔다. 쓰윽 노를 저으니 카누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지호는 노 젓는 시늉을 하며 환하게 웃었다. 하늘은 흰 구름이 깨끗하게 걷혀 파랗다. 로키마운틴의 만년설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캐나다의 대자연 한가운데 들어온 걸 비로소 실감했다.
밴프에서 가장 유명한 호수인 루이스호수는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호수는 빙판으로 뒤덮였고 그 위에 하얗게 눈이 쌓였다. 흰 눈으로 덮인 가파른 산맥과 뾰족한 침엽수림 뒤로 겨울왕국의 성처럼 으리으리한 페어몬트 샤토 레이크 루이스 호텔이 들어서 있다. 서늘하면서도 매혹적인 풍경이다.
밴프 국립공원에서 재스퍼 국립공원으로 넘어가면서 눈의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보우호수로 가는 길에 눈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눈 속에 폭 파묻힌 빨간 산장이 더욱 붉게 느껴졌다. 너른 호수는 엘사라도 다녀간 듯 꽁꽁 얼어붙어 있다. 지호의 손을 잡고 얼음 위로 한 발짝 내디뎠다. 숨막히게 거대한 산맥에 둘러싸인 광야가 펼쳐진다. 호수가 얼어 눈에 뒤덮인 풍경은 이국적이다 못해 지구 밖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머나먼 은하계의 얼음 행성에 가면 이런 풍경을 만나지 않을까.
페이토호수에서는 맨몸으로 나섰다가 예상치 못하게 설원의 산길을 걸어 올랐다. 호수를 보기 위해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길이 눈에 푹 파묻힌 것이다. 미끄러운 산길을 조심조심 헉헉대며 올라갔다. 평소에는 이십분이면 올라갈 길을 눈 때문에 한 시간 만에 힘겹게 올랐다. 지호도 산꼭대기에 다다라서 가쁜 숨을 내쉬었다. 산 위에서 내려다본 경치는 가슴이 탁 트이도록 근사했다. 비록 호수는 얼어붙어 제 빛깔을 비밀스럽게 감추고 있지만, 얼음 사이로 손톱만큼 보이는 호수의 색깔은 잉크처럼 짙고 푸르다.

도로 옆으로 펼쳐지는 밴프의 그림 같은 비경 남편은 오랫동안 크루즈 아메리카 사이트를 클릭하다가
첫 캠핑카 여행을 캐나다 밴프로 정했다.
가다가 서다가, 그렇게 자유로운

빨간 보트하우스가 물 위에 그림처럼 떠 있던 멀린 호수에서 나오는 길에 계곡을 지났다.
“계곡이 참 멋지다. 물살이 엄청 세보여.”
“잠깐 캠핑카 세워서 점심 먹고 갈까?”
연이은 호수 투어를 잠시 멈추고 캠핑카를 세워서 피크닉을 하기로 했다. 산에서 눈이 녹아 맑은 물살이 내려온다. 세차게 흐르는 소리가 귓가에 음악처럼 들린다. 침엽수림에서 햇볕을 받으며 서 있으니 저절로 힐링이 되는 듯하다. 지호는 돌멩이를 줍고 다람쥐를 쫓아 뛰어다녔다. 점심으로 간단하게 컵라면과 김치를 꺼냈다. 계곡 소리를 들으며 먹으니 무엇을 먹든 꿀맛이다.
날카로운 산새 아래 거칠게 자리 잡은 메디신호수는 좀 더 신비로운 느낌이다. 언덕 위의 나무들은 화재를 입었는지 잎사귀 없이 메마르고 가는 몸통만 남아 있다. 지금까지 봐왔던 그림 같은 호수들에 비해 메디신호수는 고독한 나그네 같은 인상을 준다. 호수들을 둘러보고 캠핑장에 오는 길에 옐로스톤에서도 못 본 곰을 운 좋게 봤다.
이제 캠핑카를 반납하러 돌아갈 시간. 캠핑장에서 아침을 먹고 출발하려는데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길이 미끄러워서 어떡하지.”
남편은 앞차를 따라서 천천히 핸들을 움직였다. 캐나다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손꼽히는 아이스필드 파크웨이가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가다가 차를 세워서 사이드 미러를 덮은 눈을 치우고 다시 가기를 반복했다. 길에는 폭설에 버려지거나 사고 난 차들이 간혹 보였다.

밴프를 가득 담은 영롱한 호수
밴프를 떠나며

위험천만한 눈길을 엉금엉금 기어 밴프 시내에 도착했다. 잿빛 하늘에는 눈발이 여전히 흩날리고 있다. 주차장에 내려서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를 발견했다.
“밴프의 날씨가 원래 이렇게 춥나요?”
“아뇨, 엊그제까지 반팔을 입고 다녔는데 날씨가 갑자기 이상해졌어요.”
마을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한인이 운영하는 기념품 가게에 갔다. 가게의 주인 아주머니는 그곳에서 20년 넘게 생활한 교민이다.
“예쁜 아이로구나. 어디에서 왔니?”
그는 지호에게 고양이 인형을 선뜻 선물로 주셨다. 고맙고도 반가운 마음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에 눈이 많이 와서 고생을 했어요. 밴프를 여행하기에 언제가 적당한가요?”
“6월이 지나면 날씨가 따뜻해지긴 하지만, 산에 눈도 사라져요. 하얗게 눈이 남아 있을 때가 멋있죠. 지금이 밴프를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예요.”
밴프를 떠나며 멀리 굴곡진 산맥을 다시 바라봤다. 산맥을 따라 쌓인 흰 눈은 풍경을 한 폭의 수묵화처럼 아름답고 역동적으로 만들어준다. 지금도 밴프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면 풍경화 속에 우리가 들어가 있는 듯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보석처럼 맑은 호수들은 저마다 캐나다의 자연과 어우러져 영롱하게 빛났다. 편안한 캠핑카 여행도 잔잔한 호수처럼 그렇게 흘러갈 줄 알았건만……. 차가운 눈과 만나며 더욱 날카로운 순간들이 펼쳐졌다. 눈 쌓인 산길을 힘겹게 올라가던 기억과 쏟아지는 눈에 차가 미끄러져 아찔했던 찰나가 떠오른다. 광활한 빙판 위에서 우주의 경이로움을 느낀 것도 눈의 여왕의 마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설레던 첫 캠핑카 여행은 그렇게 아름답고도 매혹적인 떨림으로 남아 있다.